2022년, 역사적으로 남성 지배적이고 폐쇄적으로 여겨져 왔던 ‘조각계’에 이변이 일어났다. < < 2022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 > 국제미술전 시상식에서 127년의 비엔날레 역사상 최초로 여성 조각가, 거기에 흑인 여성 조각가인 ‘시몬 리(Simone Leigh, 미국, 1967~ )’가 황금사자상 최고작가상을 받은 것이다. 자메이카계 흑인 미국인인 그녀의 작품 < 브릭 하우스(Brick House, 벽돌집) >는 그동안 주변부에 머무르거나 억압받으며, 사회적 폭력의 대상이 되어 왔던 여성들의 실존적 이미지를 부각한 작품으로 억압받은 흑인 여성의 정체성을 형성화한 작품이다.
21세기 시몬 리의 최고작가상 수상의 의미는 육중한 무게의 청동이나 대리석 등 남성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조각의 특성상 ‘남성의 영역’이라고 간주되었던 조각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편견에 끝없이 도전하며 조각에 정진해 왔던 선구적인 여성 조각가들이 함께 이루어 낸 쾌거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여성 선구자 프리네(Phryne, 그리스, B.C.4세기경), 르네상스의 여성 조각가 프로페르치아 데 로시(Properzia de Rossi, 1490~1530)의 < 요셉과 포티파르의 아내 >, 미국 최초의 여성 조각가 해리엇 호스머(Harriet Hosmer, 1830~1908) < 메두사(1854) >, 프랑스의 비극적인 천재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 영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현대주의적 혁신 여성 조각가 바바라 휍워스(Barbara Hepworth, 1903∼1975)의 < 펠라고스(1946) >, 프랑스계 미국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의 < 마망(Maman, 2000) >, 여성주의 예술의 혁신적인 작업으로 유명한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1939~ )의 < 저녁 식사 파티 > 등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인 편견과 맞서며 훌륭한 성취를 이룬 여성 조각가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본고에서는 이 여성 조각가들 중에서 1980년대에 이르러 재평가 받기 전까지 가족의 묵인으로 은폐되었던 비참한 말로와 근대 조각가의 거장 ‘로댕’이라는 거대한 스승의 그늘에 가려져 ‘로댕의 제자’, ‘로댕의 연인’, ‘로댕의 뮤즈’, ‘로댕의 아류 정도’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천재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의 삶을 통해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여성 조각가로서 삶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까미유 끌로델의 아버지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처음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에게 조각을 배우게 했으며, 그녀가 17세가 되어 조각에 대해 정식수업을 받기를 원하자 파리로 이사를 한다. 부셰 또한 까미유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에꼴 데 보자르’ 교장 폴 뒤브와에게 소개했지만, ‘여학생은 받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에 입학하지 못하고, 여학생 입학이 가능한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1881년 입학해 조각에 전념하게 된다. 로댕을 만나기 전, 그녀는 이미 자신의 독창성을 지닌 작품 < 알프레드 부셰의 흉상 >, < 열세살의 폴 끌로델 >(1881)을 제작하였고, < 늙은 엘렌 >(1882)을 < 살롱 드 메 >에 출품할 정도로 뛰어난 조각가였다.
까미유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1.12.~1917.11.17.)은 그의 친구이자 그녀의 스승이었던 알프레드 부셰가 이탈리아로 떠나게 되면서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을 부탁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1883년 말, 19세의 까미유와 43세의 로댕은 이렇게 만났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성, 당당함, 예술적인 열정과 독창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댕은 1884년 그녀를 정식 조수로 채용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가 급진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1899년 로댕과 완전히 결별하기까지 까미유는 15년간 로댕의 곁에서 제자로, 모델로, 공동 제작자로, 뮤즈로, 연인으로 서로 영감을 주고 받으며 위대한 작품들을 창작해 내었다. 까미유를 모델로 한 로댕의 작품은 < 사색 >, < 오로라 >, < 다나이드 >, < 지옥문 >, < 생각하는 사람 >에 나오는 저주받은 영혼 여럿에 등장했다. 1885년과 1896년 사이에 만들어진 < 영원한 우상 >, < 입맞춤 >, < 영원한 봄날 >, <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 같은 작품에서는 사랑에 빠진 연인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표현하기 시작하였으며, < 웅크린 여인 >, < 나는 아름답다네 >, < 신들의 전령 이리스 >와 같은 작품은 가장 도발적이면서 선정적인 작품에 속하는 것으로 로댕의 작품에 까미유가 커다란 영감을 제공하였고, 특히 손과 발의 표현을 중요시하던 로댕은 작품 속 인물들의 손과 발의 제작을 까미유에게 맡길 정도로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다.
그녀는 로댕의 제작조수로 있으면서도 꾸준히 그녀만의 독자적인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1884년 < 일어선 여인의 토루소 >, < 나의 남동생 >, 1885년 < 웅크린 여인의 토루소 >, < 루이즈 끌로델의 흉상 >, < 지강티 >, 1887년 < 젊은 로마인 >, < 밀단을 진 소녀 >, 1888년 < 페르디낭 드 마사리의 흉상 >, < 샤쿤탈라 > 등을 제작하였으며, 특히 < 사쿤탈라 >는 < 파리 살롱전 >에서 최고상을 입상하며 그녀가 뛰어난 예술가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까미유의 작품 < 밀단을 진 소녀 >(1887), < 사쿤탈라 >(1888)와 로댕의 작품 < 가라테아 >(1889), < 영원한 우상 >(1889)이 표절시비가 붙으며 제자이자 연인이었고 조수였던 까미유가 로댕의 입지를 위협하는 라이벌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통념상 여성인 까미유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작품을 만들 수 없으므로 그녀의 스승이자 나이 많은 남성, 명성과 지위, 예술적 권력을 가지고 있던 로댕의 편을 들어주는 분위기였다. 이것을 계기로 까미유는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적 제약을 통감하며 로댕의 제자, 로댕의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예술가로서의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