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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조각가로서의 삶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을 중심으로-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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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Simone Leigh, < Brick House >, 2022
2022년, 역사적으로 남성 지배적이고 폐쇄적으로 여겨져 왔던 ‘조각계’에 이변이 일어났다. < < 2022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 > 국제미술전 시상식에서 127년의 비엔날레 역사상 최초로 여성 조각가, 거기에 흑인 여성 조각가인 ‘시몬 리(Simone Leigh, 미국, 1967~ )’가 황금사자상 최고작가상을 받은 것이다. 자메이카계 흑인 미국인인 그녀의 작품 < 브릭 하우스(Brick House, 벽돌집) >는 그동안 주변부에 머무르거나 억압받으며, 사회적 폭력의 대상이 되어 왔던 여성들의 실존적 이미지를 부각한 작품으로 억압받은 흑인 여성의 정체성을 형성화한 작품이다.

21세기 시몬 리의 최고작가상 수상의 의미는 육중한 무게의 청동이나 대리석 등 남성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조각의 특성상 ‘남성의 영역’이라고 간주되었던 조각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편견에 끝없이 도전하며 조각에 정진해 왔던 선구적인 여성 조각가들이 함께 이루어 낸 쾌거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여성 선구자 프리네(Phryne, 그리스, B.C.4세기경), 르네상스의 여성 조각가 프로페르치아 데 로시(Properzia de Rossi, 1490~1530)의 < 요셉과 포티파르의 아내 >, 미국 최초의 여성 조각가 해리엇 호스머(Harriet Hosmer, 1830~1908) < 메두사(1854) >, 프랑스의 비극적인 천재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 영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현대주의적 혁신 여성 조각가 바바라 휍워스(Barbara Hepworth, 1903∼1975)의 < 펠라고스(1946) >, 프랑스계 미국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의 < 마망(Maman, 2000) >, 여성주의 예술의 혁신적인 작업으로 유명한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1939~ )의 < 저녁 식사 파티 > 등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인 편견과 맞서며 훌륭한 성취를 이룬 여성 조각가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본고에서는 이 여성 조각가들 중에서 1980년대에 이르러 재평가 받기 전까지 가족의 묵인으로 은폐되었던 비참한 말로와 근대 조각가의 거장 ‘로댕’이라는 거대한 스승의 그늘에 가려져 ‘로댕의 제자’, ‘로댕의 연인’, ‘로댕의 뮤즈’, ‘로댕의 아류 정도’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천재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의 삶을 통해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여성 조각가로서 삶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까미유 끌로델의 아버지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처음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에게 조각을 배우게 했으며, 그녀가 17세가 되어 조각에 대해 정식수업을 받기를 원하자 파리로 이사를 한다. 부셰 또한 까미유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에꼴 데 보자르’ 교장 폴 뒤브와에게 소개했지만, ‘여학생은 받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에 입학하지 못하고, 여학생 입학이 가능한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1881년 입학해 조각에 전념하게 된다. 로댕을 만나기 전, 그녀는 이미 자신의 독창성을 지닌 작품 < 알프레드 부셰의 흉상 >, < 열세살의 폴 끌로델 >(1881)을 제작하였고, < 늙은 엘렌 >(1882)을 < 살롱 드 메 >에 출품할 정도로 뛰어난 조각가였다.

까미유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1.12.~1917.11.17.)은 그의 친구이자 그녀의 스승이었던 알프레드 부셰가 이탈리아로 떠나게 되면서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을 부탁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1883년 말, 19세의 까미유와 43세의 로댕은 이렇게 만났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성, 당당함, 예술적인 열정과 독창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댕은 1884년 그녀를 정식 조수로 채용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가 급진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1899년 로댕과 완전히 결별하기까지 까미유는 15년간 로댕의 곁에서 제자로, 모델로, 공동 제작자로, 뮤즈로, 연인으로 서로 영감을 주고 받으며 위대한 작품들을 창작해 내었다. 까미유를 모델로 한 로댕의 작품은 < 사색 >, < 오로라 >, < 다나이드 >, < 지옥문 >, < 생각하는 사람 >에 나오는 저주받은 영혼 여럿에 등장했다. 1885년과 1896년 사이에 만들어진 < 영원한 우상 >, < 입맞춤 >, < 영원한 봄날 >, <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 같은 작품에서는 사랑에 빠진 연인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표현하기 시작하였으며, < 웅크린 여인 >, < 나는 아름답다네 >, < 신들의 전령 이리스 >와 같은 작품은 가장 도발적이면서 선정적인 작품에 속하는 것으로 로댕의 작품에 까미유가 커다란 영감을 제공하였고, 특히 손과 발의 표현을 중요시하던 로댕은 작품 속 인물들의 손과 발의 제작을 까미유에게 맡길 정도로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다.

그녀는 로댕의 제작조수로 있으면서도 꾸준히 그녀만의 독자적인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1884년 < 일어선 여인의 토루소 >, < 나의 남동생 >, 1885년 < 웅크린 여인의 토루소 >, < 루이즈 끌로델의 흉상 >, < 지강티 >, 1887년 < 젊은 로마인 >, < 밀단을 진 소녀 >, 1888년 < 페르디낭 드 마사리의 흉상 >, < 샤쿤탈라 > 등을 제작하였으며, 특히 < 사쿤탈라 >는 < 파리 살롱전 >에서 최고상을 입상하며 그녀가 뛰어난 예술가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까미유의 작품 < 밀단을 진 소녀 >(1887), < 사쿤탈라 >(1888)와 로댕의 작품 < 가라테아 >(1889), < 영원한 우상 >(1889)이 표절시비가 붙으며 제자이자 연인이었고 조수였던 까미유가 로댕의 입지를 위협하는 라이벌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통념상 여성인 까미유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작품을 만들 수 없으므로 그녀의 스승이자 나이 많은 남성, 명성과 지위, 예술적 권력을 가지고 있던 로댕의 편을 들어주는 분위기였다. 이것을 계기로 까미유는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적 제약을 통감하며 로댕의 제자, 로댕의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예술가로서의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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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까미유 끌로델과 오귀스트 로댕 작품 비교 
까미유와 만났던 당시 로댕은 20년간 마리 로즈 뵈레(1844.6.9.~1917.2.14.)와 동거 중이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까미유보다 두 살 어린 아들도 있었다. 까미유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떳떳한 동반자로서, 로댕의 그림자가 아니라 온전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원했지만 약속을 져버린 로댕에 대한 실망, 낙태로 인한 절망(1893년), 그리고 자신의 작업에 영감과 에너지를 주는 조용한 조력자이길 원했던 로댕의 이기심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등으로 1892년 로댕의 작업실에서 나와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로댕의 끈질긴 구애로 인해 아틀리에를 여러 번 옮겨야 했으며, 1899년 그녀의 대리석 조각품 < 끌로토 >로 인하여 완전한 결별이 이루어진다.

독립한 그녀는 그동안 억압되었던 예술적 정체성을 찾고, ‘로댕의 아류작’이라는 평판을 벗어나기 위해 조각에만 전념하게 된다. < 끌로토 토르소 >, < 소녀 성주 >, < 중년 >, < 왈츠 >, < 성숙 >, < 수다쟁이들 >, < 파도 >, < 벽난로  앞에서의 꿈 >, < 오로라 >, < 플롯을 부는 여인 >, < 페르세우스와 고르곤 >, < 상처받은 니오비드 > 등의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며 꾸준하게 전람회에 작품을 전시하였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녀의 고향 빌네브의 광장에 세워질 기념 조각을 제작하기를 희망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하며 여성 조각가로서의 좌절을 또한번 맛보게 된다. 그리고 1895년 국가의 제작 의뢰를 받아 진행하던 < 중년 >의 갑작스런 제작 취소 통보(1899)와 같은 해 전람회에 출품되었던 (대리석으로 만든) < 끌로토 >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까미유는 로댕이 작품을 훔쳤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하였다. 1905년, 1907년, 1908년, 그녀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외젠 블로’ 화랑에서 개최된 개인전은 몇몇 비평가들을 열광시켰으나 당시의 사회와 언론은 그녀의 작품에 혹평을 쏟아내면서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제작 중 취소된 < 중년 >에 이미 투입되었던 제작비, 완성된 작품의 지연된 대금 지불, 소수의 제작 의뢰, 조각에 꼭 필요한 비싼 재료 등으로 인하여 까미유는 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까미유의 작업은 1906년까지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부터는 자학과 고립, 알콜 중독, 로댕에 대한 증오와 피해망상이 심해져 갔다. 그 사이 그녀는 그동안 만들어 놓았던 작품들을 하나씩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재능을 잘 이해하고 후원했던 아버지와 달리 평생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191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8일만에 그녀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시켜 그녀가 생을 마치는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은폐 당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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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Camille Claudel, < Clotho >, 1893
이렇게 잊혀져 갔던 그녀가 다시 재조명된 것은 까미유의 동생인 폴 끌로델의 열렬한 독자였던 안 델베가 폴의 『눈이 듣다』,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를 읽고, 위대한 조각가 ‘까미유’라는 누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 1981년 안 델베와 잔 파이라가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이름의 여인』의 극본을 쓰고 공연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그녀의 전기를 조명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해, 안 델베가 이 연극을 바탕으로 쓴 동명의 전기소설이 성공을 거두면서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천재적인 조각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녀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여러 책이 발간되었고, 세계 각국에서 그녀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며 두차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동안 그녀의 작품은 로댕 미술관 안 ‘까미유 끌로델 전시실’에 전시되고 있었으며, 2017년 3월 26일, 그녀의 이름을 딴 ‘까미유 끌로델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로댕 사후 100년, 까미유 사후 74년 후에야 그녀의 진정한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로댕과 까미유는 표절시비가 붙을 정도로 서로에게 창조적인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냈다. 그러나 동시대에 탄생한 두 천재는 서로의 천재성을 알아보며 사랑했고 사제지간의 사랑과 불륜이라는 세간의 이목보다도 예술가로서 서로에게 가졌던 경쟁심으로 파국을 맞이한다. 19세기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성공적인)결혼을 통해 사회적 명성이나 지위를 얻었을 수 있었고, ‘로즈 뵈레’라는 존재는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이상적인 여성상’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로댕의 곁에서 묵묵히 내조를 했던 로즈 뵈레 역시 로댕의 초기 작업에 영감을 준 뮤즈였지만 로댕과 잠정적인 경쟁 관계에 놓여 있던 까미유와 달리 위협스러운 뮤즈가 아니었기에 그의 곁에서 머무는게 가능했다. 돈을 지급하고 구한 여성 모델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영감을 얻어 거칠고 강한 작품을 창조했던 로댕과 달리 까미유는 자신의 주변인과 책 속의 인물들을 그녀의 ‘상상력’과 ‘독창력’,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조각해 냈다. 두 사람의 작품은 이렇게 같은 듯 달랐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열등하여 창조성이 없고 성공적인 결혼으로만 완성되는 존재라는 그릇된 사회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이 팽배했던 사회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학하지 못했던 ‘에꼴 데 보자르’가 이러한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조각 재료의 특성상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되었던 조각계에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여성의 존재는 당시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까미유가 자신과 대등한 위치 또는 입지를 위협하는 경쟁자로 부상하자 그녀를 향해 예술적 권력을 휘둘렀던 로댕은 당시 만연했던 남성중심의 사회의 또다른 일면이었다. 그러한 남성중심 권위주의에 도전하며 주체로 살고자 하였으나 타자로 살 수 밖에 없었고 ‘로댕의 제자’가 아니라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온전한 조각가로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19세기의 여성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은 혼자의 힘으로는 거대한 세상을 이길 수 없었기에 결국 자학과 고립을 택하며 쓰러졌다.

까미유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외젠 블러의 편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제 시간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녀의 뒤를 이은 21세기의 후배 조각가 ‘시몬 리(Simone Leigh)’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X는 < 애원하는 여인 >에 대해 아직도 경탄해 마지 않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작품을 현대 조각의 선언이라고 여기지요.  당신은 결국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로댕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솜씨에서뿐 아니라 상상력의 영역에서도 위대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중략-
시간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도미니크 보나, 박영숙 역, 『위대한 열정-까미유와 폴』, 아트북스, 2008.
엘렌 피네, 이희재 역, 『로댕 신의 손을 지닌 인간』, 시공사, 2010.
이운진, 『여기, 카미유 클로델』, 아트북스, 2022.
정금희,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 재원, 2013.
카미유 클로델, 김이선 역, 『카미유 클로델』, 마음산책, 2010.
헤시오도스, 천병희 역, 『신들의 계보』, 숲,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