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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끝에서 예술을 외치다. 
-Gordon Bennett; Big Romantic Painting:
Apotheosis of Captain Cook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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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아르헨티나 리오 핀투라스(la cueva de las manos) 암각화 (기원전13000-9500년경)
동굴의 암각화에 무수하게 그려진 손들이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기원전의 질문은 멈춘 적이 없다. 동시대를 사는 지금, 우리도 예술을 통해 존재를 묻고 존재를 통해 예술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서 단토(Arthur C. Danto 1924-)가 서술하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도 질문은 이어진다. 단토는 “예술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물음은 오히려 예술가들이 경계선을 차례차례 밀쳐내고 드디어 모든 경계선이 무너졌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예술 내부에서 생겨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예술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가능해진 것은 미술사의 특정단계가 도래하고 나서였다. 이것은 예술의 종말 이전의 두 내러티브 즉, 바자리와 그린버그 내러티브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바자리로 상징되는 재현미술은 사진기의 발명으로 마무리되고 다음으로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이 막을 내리는 예술의 종말 이후 마침내 다원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호주 ACCA(Australian Centre for Contemporary Art)에서 1995년에 열렸던“Seven Histories of Austrailia”는 ‘예상되는 재현의 경계를 넘나들며 개인의 경험과 장소감을 탐색하며, 개인적인 이야기나 환원적인 정체성의 정치를 뛰어넘어 예상치 못한 일들을 기록하는 등 신선한 관심의 폭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 전시회에 참여했던 고든 베넷(Gordon Bennett,1955-2014)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종말 이후의 다양하게 표출되는 다원주의 예술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2001년은 영국과 호주 연방 100주년을 맞이하여 화해 추구에 대한 새로운 방안들로 인해 아마 ‘탈식민주의’문화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들의 정체성과 운명에 대한 질문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동시대 예술가들은 아카이브를 샅샅이 뒤지느라 바쁘다.”

 
1995년 “일곱 개의 역사” 전과 관련해 비평가 스테파니 홀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시가 열렸던 1995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혐오를 부추기는 사회, 그리고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쪼개며 이어지는 여러 논쟁 속에서 과거는 계속해서 우리를 속박하고 있다. 그 유산에 맞서려면 편파성과 모순 속에 있는 과거에 대한 인식은 그 흔적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 이상을 필요로 하며 예술가들은 그때도 지금도 큰 축을 담당한다. 베넷은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방식으로 경계를 탐색하고, 지우고 다시 그리며 ‘과거에 묶인 역사’를 드러내었다.
 
"나는 스코틀랜드, 영국, 그리고 토착 오스트레일리아인의 혼합된 전통을 물려받았습니다. ‘백인’ 호주인으로 길러지고 교육받아 사회인이 된 나는 현대 호주사회 내에서 원주민의 역사적인 묘사를 지배하는 인종적 전형과 힘/지식의 관계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물려받은 토착민적인 유산을 탐구하고 싶었고, 어떻게 그것이 식민지 역사와 현실과 뒤얽히게 되었는지 연구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나의 관심을 추구하는데 있어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적인 틀 안에서 ‘차용’이라는 수단이 가장 적당한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탈식민주의 흐름에서는 서구 중심의 지식체계를 해체하고 그 과정에서 배제된 타자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목적을 두었다. 본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타자를 주제로 공명하는 역사를 다루는 고든 베넷은 정체성과 운명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맥락에 대한 예리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가 발견한 이미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또, 교묘하게 수신된 시각적인 어휘들을 조작하며 화면을 구성한다. 이런 구성은 질문을 만들어 내고 그 질문들이 만들어진 배경을 탐색하게끔 우리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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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Gordon Bennett, < Big Romantic Painting: Apotheosis of CptainCook >, 1993
이 작품에서 태곳적 산맥이나 늪처럼 표현된, 어느 날 갑자기 강탈당한 대지와 영토는 호주 대륙의 발견자와 그들이 부르는 ‘고전적인 승리’를 비틀기 위한 요소로 보이며 특히, 작은 점들의 사용은 점묘주의를 상기시키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정보 위장을 위해 사막 회화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법을 반영하기도 했다. 피부색을 칠하지 않은, 흰 화면으로 두었기에 짐작이 가능하나 불확실한 인종인, 커다란 눈을 가진 한 인간은 그림 중앙에서 침몰중이다.

그는 중앙 소실점으로 표시한 점을 간절히 바라보며 물웅덩이 같은 늪에서 빠져나오고자 필사적으로 노력 중이다. 그렇지만 이미 그의 몸은 90% 이상이 잠겨서 탈출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가 탈출을 위해 발버둥치며 튀겼을 자국들은 마치 ‘폴락(Paul Jackson Pollock, 1912-1956)의 스타일처럼 광란을 뿜어낸다. 이 자국들이 튀는 동안 캔버스 전체를 가득 메우는 손자국들은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야만인들(제국건설에 혈안이 된 서구인들에 눈에 비친 원주민들을 부르던 용어로서)의 그것과 같다. 그 자국들은 검은 물결 속에서 희미해지기도 하고 뚜렷해지기도 한다. 베넷에게 예술가의 손은 예술의 또 하나의 전략으로 사용된 것처럼 보이는데, 화면 가득 마구 찍어낸 듯한 손자국은 ‘소리없는 외침’으로 표상된다.

화면 왼편 아래쪽으로는 원주민들이 검은 불을 피우고 있으며, 검은 불은 캡틴 쿡의 신화를 태워버리는 중이다. 검은 불은 활활 타올라 이 신화를 모조리 불 태워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화면 오른편 아래쪽의 바람에 날려 펄럭이는 흰 옷을 입고 있는 샤먼처럼 보이는 원주민은 양 발로 대지 위를 단단히 딛고 서있다, 오른손에는 결연함이 느껴지는 의지의 지팡이를 꼭 쥐고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다. 그/그녀의 옷자락을 힘차게 펄럭인 변화의 바람은 이미 불어왔으니 저 불길은 꺼지지 않고 거세질 것이라는 예언이 담긴, 그들의 선조들이 흘린 낭자한 선혈이 만든 붉은 빛으로 가득한 대기는 그들의 영토를 물들이는 중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서구/비서구, 제국/식민지, 강자/약자, 선/악, 문명/야만 이라는 이분법적인 접근을 통해 ‘타자를 담론화’하는 작가의 의도를 비교적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운동은 모든 인종과 문화를 동등한 위치에 존재함을 인정하고 조화를 주장했으나 과거 식민지 국가들이 정치적 독립을 이룬 이후에도 서구 헤게모니의 역할을 간과한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그 이론 등에 등한시되었던 민족과 인종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탈식민주의가 문화 연구에 편입되며 1990년대에는 전 세계의 문화 영역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아서 단토가 이야기한 1984년 ‘예술의 종말 이후’ 즉, 내러티브의 역사가 끝나고 다원주의(pluralism)로 향하는 시기의 일이었다.

호주 국내적으로는 영국 연방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독립적인 헌법개정에 목소리를 높이는 때였고, 세계적으로는 1989년 냉전 구조의 종식과 www(world wide web)로 세계의 물리적거리가 좁혀지던 시기였다. 해체되고 재정립이 이루어지는 ‘다원화’라는 흐름이 시공간을 넘어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에 고든 베넷은 자신의 삶을 통해 전달된 이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작품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식민의 내러티브는 종말을 맞이했으나, 식민의 역사는 종료되지 않았다. 버넷은 종료되지 않은 역사를 종말 이후의 예술이 일으킨 바람으로 맞이했다. 일찍이 단토는 종말에 도달한 것이 예술 자체가 아니라 내러티브이지 내러티브의 주체는 아니라고 했으며, 이를 이야기가 종료되고 나서 진짜 시작되는 인생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베넷은 사망하는 2014년까지 멈춤 없이 인종과 정치성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작업을 이어 나갔으며, 개인의 이야기가 종료된 이후 시작된 진짜 인생의 주체(단토의 이야기를 빌리자면)로서 이어지는 질문들을 작품 안에서 찾고 발견하는 과정을 거치며 21세기 탈식민 담론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로 우리 곁에 남았다.

그렇다면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에도 단토가 지칭한 예술계(art world)는 다원주의가 추구하는 방향대로 실현되고 있을까? 예술계는 이제 다원화의 장으로서 다양한 실험을 양산해냄과 동시에 슈퍼 콜렉터들의 소유를 매개하는 장으로 그 폭을 더욱 확장 중인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다시 종말 이후의 종말을 선언해야 하는 때가 곧 닥쳐올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현대의 예술과 미학, 미학대계 제3권』,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7.
백정원, 「현대미술에서 나타나는 탈식민연구」, 2008.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 문화, 2004.
정낙림, 「매체와 예술의 종말 – 벤야민의 이론을 중심으로 -」 철학논총, 2021.
 
https://suttongallery.com.au/artists/gordon-bennett/publications
https://www.gwangjubiennale.org/gb/archive/past/works.do
Stephanie Holt, ‘Seven Histories of Australia', World Art, Issue 1. 1996.
Malvern-Prahran Leader, Wednesday 11th October, 1995.
https://acca.melbourne/exhibition/seven-histories-of-australia1995.09.23~10.29
https://www.e-flux.com/journal/73/52560/on-the-frontier-again/
https://www.e-flux.com/announcements/28844/gordon-bennett-and-slavs-and-tatars
https://theconversation.com/one-of-the-most-important-australian-artists-of-the-late-20th-century-gordon-bennetts-unfinished-business-149433

이미지 출처

https://acca.melbourne/exhibition/seven-histories-of-austra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