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기 시작한다. 그곳에 누워 눈이 쌓일 때까지 충분히 기다린다.
앤디 골드워시(Andy Goldsworthy, 1956- )는 그 자리를 떠나며 “그곳에 나를 남겨두었다”라고 말했다. 눈의 그림자 작품은 아주 간단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리는 양과 지속되는 시간, 지면의 경사도, 사람들의 움직임과 같은 복잡한 연관성을 고려해야 했다. 또 반밖에 쌓이지 않았는데 눈이 그친다거나 기상 예보를 듣고 한 시간이 넘도록 누워서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다. 무수한 기다림의 시간은 자연의 리듬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는 춥거나 따뜻한 곳과 같은 특정 장소를 선호했는데 변화무쌍한 영국 날씨는 최적의 작업 공간이면서 작업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앤디 골드워시는 시간에 관해 관심이 컸다. 시간개념을 이해하고 작품화시키기 위해 스스로가 작품 일부가 되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제 시간 제약적인 작품들은 모두 완성되는 순간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기온이 낮고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 새벽 서리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서 있다. 서리가 내린 들판에 서서 그림자를 제외한 서리가 녹을 때까지 태양을 등지고 기다렸다. 빛에 의해 지면의 서리는 녹아 원 상태로 돌아가고 앤디 골드워시에 가려진 땅에는 서리가 녹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그림자라 칭했다. 날씨 기후, 온도의 변화와 지속되는 자연현상은 작품의 전부이며 그 과정에서 그는 결코 인공적으로 형태를 달라지게 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다. 앤디 골드워시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생성과 소멸을 증명하는 시간개념의 작업이다.
앤디 골드워시 아버지가 영국 리즈대학교 수학 교수로 임용되던 해 1961년부터 요크셔의 리즈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3살의 앤디 골드워시는 형과 함께 휴일에 농장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에서 우유병을 씻고 짚 더미를 어깨에 메는 등 힘든 농사 일을 했다. 대부분 농장 일은 온종일 반복적인 노동이었다. 이 당시 농장에서 일한 경험이 훗날 그의 예술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내 작업의 대부분은 감자 캐기와 같습니다. 그 속에서 리듬을 알아야 해요”
농장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인간과 대지의 작업이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훗날 대지 미술가가 되었고 형은 농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초지 생태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게 된다.
앤디 골드워시는 잎가지 줄기, 가시를 손으로 엮는 제작 방식을 선택했다. 평가절하되었던 여성의 생산 방식이라 인식 되어온 나무에 수놓은 표현이다. 그는 창조물에 대한 사전 계획을 하지 않았다. 자연에서 우연히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연구하고 실험했다. 그 과정에서 매번 새로운 형태를 발견했다. 인공적으로 형태를 달라지게 하거나 의도하지 않으면서 연속적으로 시험과 이해에 의미를 두고 있다.
대지미술은 현대미술의 한 흐름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확장된 장(Expanded Field)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대지 미술을 현대 조각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사회적·문화적 환경과 결부된 대지미술은 공공미술적 성격도 가진다. 대지미술은 1960년대 후반 이후 등장했으며 주로 광활한 자연 대상물인 사막, 산, 계곡, 해변 등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이를 통해 미술 개념의 지평을 확대했다. 환경이 미술의 영역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고 대표적인 작가로 앤디 골드워시, 로버트 스미스슨, 마이클 하이저, 크리스토 자바체프를 꼽을 수 있다. 앤디 골드워시를 비롯한 대지 미술 작가들은 인위적으로 완결된 작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를 자연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작품을 통해 자연의 변화에 참여하는 태도로 작업을 한다. 전통적인 자연의 모방이나 자연을 변형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으로 들어가 새로운 관계 설정을 시도할 뿐이다.
대지미술가들의 형성 배경과 마찬가지로 앤드 골드워시 또한 당시 미술관의 전시를 통해 상품으로 변화되고 관람자는 공간이 제한하는 구조에 따라 작품을 감상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미술을 후원하는 체제를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 땅을 중심으로 작업을 선택했다. 그것은 제도권에 대한 거부로 그 신념을 상징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대지미술은 기존 미술관 제도를 벗어나 자연환경을 작품화한 표현 영역으로 확장해 나갔다. 언제나 대지 미술가들이 대중의 예술적 감성 즉 환경미술로서 대중과의 완전한 공감을 했던 것만은 아니다. 로버트 스미스슨의 < 아스팔트 흘러내림 >, 마이클 하이저처럼 자연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대지 미술은 환경 의식이 결여된 < 이중부정 >과 같은 작품으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70년 환경오염에 대한 사회적 여론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서 그 영향은 미술계에도 미치기 시작했다. 비판적인 여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던 마이클 하이저는 환경에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조각의 대체물을 생각해 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자연 고유의 형태인 돌이었고 곧 돌을 이용해 대지미술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주위 환경과 부조화를 이루는 공공미술 작품은 적절한 소통의 과정을 통해 그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새로운 시각을 도출시키기도 했다. 인간의 삶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을 허용하는 곳은 지금 땅을 딛고 서 있는 지구의 대지다. 지구는 대지미술의 중심이고 근원이다.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과 신비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그어놓은 선을 지운다. 지구라는 거대한 대지는 작가에게 또는 우리에게 잊고 있던 순수함과 희망을 그릴 수 있도록 내어주었다. 앤디 골드워시의 자연과 도시를 배경으로 제작한 다양한 기후 자연물 작품은 생성과 동시에 소멸을 상징한다. 그 상징성의 의미처럼 다시 생성될 것을 약속이나 하듯 자연은 지금도 순환을 쉼 없이 반복한다.
앤디골드워시의 작품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어 직접 마주할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대신 지난 작업을 120점 컬러의 작품집을 통해 볼 수 있다. 국가보조금이나 후원을 받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대지미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는 “진정한 예술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작품 비용도 스스로 부담했다. 작업을 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프로젝트가 완성된 후 사진첩을 출간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앤디 골드워시와 공통점이 있다. 기록의 의미가 강한 매체가 사진 또는 영상이다. 크리스토 작품이 사진, 스케치, 영화로 남아 있듯 앤디 골드워시의 작품도 사진과 영상으로만 남아 있다.
앤디 골드워시의 이 모든 작업 바탕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자연이 있다. 하지만 과정에서 작업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비와 눈 또 빛을 통해 그림자를 표현하는 과정에는 멈춘 것 같은 순간에도 시간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필자에게 ‘눈’ 소재는 더욱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한 언덕에서 시작해 눈을 뭉쳐 길을 만들어 길을 지나온다. 뒤를 돌아보면 지나간 시간이 만든 길이 있다. 그 눈 덩어리는 고체가 되었고 빛에 녹아 액체가 되었다. 그것은 기체가 되어 다시 비나 눈이 되어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앤디 골드워시에게 물의 순환을 이해하는 것은 곧 자연의 법칙의 이해였고 그것은 지나온 혹을 다가올 삶을 이해하게 되는 방식이지 않았을까.
< 그림자 > 작업처럼 자신을 자연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만히 놓아둘 수 있었다. 비록 기록된 작품 사진으로만 남아있지만 계절의 색과 형태의 아름다움의 여운을 느낄 수있다. 그저 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친숙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연의 감성 그리고 본질을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앤디 골드워시를 한 줄로 소개한다면 “대지미술가, 생태미술가, 환경미술가답게 품위와 개념을 완전하게 지켜나가는 예술가”라고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