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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들에 대하여 
- 김범 작가의 작업에 대한 소고(小故)
백운현(노트(KNOT:) 객원필진)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1916
 
대다수의 인간은 ‘동경’한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항상 우리는 무언가를 막연하게나마 바라면서 살아간다. 조금 더 쉬고 싶다거나,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거나 하는 사소한 욕망에서부터 때로는 초월적 구원까지, 우리는 다양한 형식의 동경을 지닌다. 그렇기에 ‘인간은 동경의 형식이다.’라고 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다만 적어도 인간이 동경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겠다. 동경이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혹은 주어질 수 없는 것,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의 감정일 것이기에, 인간은 그리움이라는 형식이 될 수 있을지언정 구원이라는 내용을 자체적으로 가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일반적인 동경은 아마 불변하는 가치나 영원, 구원을 상정하고 있으리라. 물론 영원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가 동경임을 납득할 수는 있어도 모든 동경이 영원의 가치로만 수렴된다고 얘기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인간이 무언가를 동경할 때, 그것은 곧 동경하는 것에 대한 성취를 요구하며 그 성취가 언젠간 다시 인간의 손을 벗어나 무가치함으로 환원되는 상황을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그 욕망에는 그것이 인간에게 온전히 합치되어 인간 내에서 영원히 향유됨을 전제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루카치의 말은 바로 이러한 동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루카치의 논의를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단적으로 얘기하면 루카치는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에, 세계 1차 대전을 전후로 하여 일종의 종말론을 목격했다. 다시 말해 전운이 감도는 시대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동경의 형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이에 루카치는, 서양의 문학들을 역사철학적 관점으로 접근하여, 여러 작가를 통해 드러나는 문학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의 형식을 고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런 작업을 수행한 것은 루카치뿐만이 아니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고한 이후, 그리고 세계가 전쟁의 불안에 휩싸인 시대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고자 하는 것, 다시 말해 불안 속에서 새로운 동경을 찾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동경은 낭만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겠다. 실로 낭만주의는 역사적으로도 혼돈 속에서 생성된 사조였으며,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낭만주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 유럽의 사조는 고전주의와 계몽주의가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의 회귀를 꿈꿨던 르네상스의 영향 아래서 시작된, 통일적 형식과 정형화된 미를 추구한 사조이며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문화와 문명을 진보시키는 이성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했던 경향이다. 이 둘은 질서라는 측면에서 유사한 지점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은 이들이 추구했던 질서와 원리가 모두 무화(無化)되는 사건이었다. 이성과 합리, 질서와 균형의 원리가 붕괴하는 것을 보고 인간은 폐허 위에 또 다른 문화를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낭만주의, 다시 말해 내면과 세계를 일체화시키는 작업이었다.
 
사실 모든 이론의 형식이 자아와 세계를 일치시키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다만 낭만주의는 질서를 통해 그 간극을 해소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막연한 동경,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방법론이 부재하는 동경의 형식이었다. 어떻게 세계와 자아를 화해시킬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고민하면서 출발한 회의라기보다 단지 자아와 불일치하는 세계를 합치시키고 싶다는 욕망의 목적으로부터 파생되는 무수히 많은 시도들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대안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강한 동경들을 세계화시키는 작업들이었기에 그 과정에서 좌절한 많은 낭만주의자는 퇴폐의 길, 몰락의 길을 걸었다. 낭만은 끊임없이 동경을 바라지만 결코 동경에 닿을 수 없다는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그 결과는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낭만이란 퇴폐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여기서 낭만주의의 의의를 자세히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낭만을 종종 하나의 사조처럼 이해하곤 하지만, 동경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낭만은 항상 우리에게 있었다는 점을 얘기해두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고전주의나 계몽주의도 이성과 질서의 가치를 최고로 두고 그 원리를 세계에 투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동경의 형식 중 하나인 셈이다. 다만 낭만이 일종의 사조로서, 이즘(ism)으로 표면화된 사건은 ‘동경의 형식에 대한 부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자아가 세상과 괴리감을 느낄 때,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동경의 방법론이 더 이상 불가능할 때, 오로지 동경이라는 감정만이 남은 사건이 바로 낭만주의인 것이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이는 하나의 의문이다. ‘동경의 형식이 사라진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의문은 김범의 작품들을 바라본 필자의 작은 단상으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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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 >, 2010
우선 필자가 김범 작가의 작업에 눈길을 보내게 된 이유는 《교육된 사물들(Learned Object)》(2010)이라는 시리즈가 발단이었다. 이 연작들은 <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A rock that was taught it was a bird) >, <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A rock that learned the poetry of Jung Jiyong) >, <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A ship that was taught there is no sea) >, <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Objects being taught they are nothing but tools) >, 4가지의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범 작가의 작업물을 종종 언급하는 기사나 평은 이런 작업이 종래의 교육 시스템을 풍자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인 것이, <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Objects being taught they are nothing but tools) >만 보더라도 일반적인 교실 풍경 속에서, 책상에 앉아있는 여러 가지 사물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사물들이 교육받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내용이며 칠판 옆 TV에서 나오는 강의도 ‘사물들이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풍경 속에서 관객들은 현실 사회의 교육 시스템과 겹쳐 보면서 작가의 비판적인 시선을 포착한다. 이를 단순히 교육에 대한 비판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을 비틀어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기존의 태도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작가의 메시지를 엿볼 수 있다는 평들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작업이 과연 교육에 대한 비판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차라리 인식에 대한 전환이 교육이라는 테마로 드러난 것일지언정 <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Objects being taught they are nothing but tools) >을 기존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피상적인 차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이런 작업을 하는 작가의 의도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가 궁금했으며 그것은 단순히 교육 체계를 비판한다거나 하는 사회적 맥락은 부차적인 것으로 느껴졌기에 의문을 가진 것이다. 사실 이 작업에서 교실에 배치된 사물들을 ‘교육화된 우리’와 겹쳐서 볼 근거를 작품 내부에서 찾기는 어렵다. 이를 우리 현실과 겹쳐서 볼 수 있는 것은 작품 해석 근거를 개인의 경험이나 사회적 맥락까지 밀고 나갔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작품 해석 방식이 부적절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작가의 심층적인 기저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이 작품에서 ‘사물들이 교육받고 있는 상황이 부당하다’는 근거가 작품 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물은 그저 자신들이 사물임을 교육받고 있는 상황인데, 역으로 질문해보자. ‘사물이 사물이라고 교육받는 상황이 부당한가?’ 예를 들어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고, 정의하는 방식이 부당한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그렇게, 혹은 그런 언어로 정의되는 것이 부당한가?’ 물론 언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은 더 이상 드문 관점이 아니다. 언어의 기의와 기표의 관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구조주의가 등장한 이후 꾸준히 제시되어 왔던 일이다. 문제는 언어에 대한 이런 회의적인 시각이 김범 작가의 작품에서, 교육이라는 맥락을 통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이다. 왜 하필 교육인가. 이 질문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란 무엇인가’부터 되물어야 할 것이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맥락을 가지는데 하나는 계몽, 또 다른 하나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질서 유지다. 계몽이 최초의 교육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라면 질서 유지는 그러한 교육이 이어져 내려올 때의 현상이다. 다시 말해 교육은 이성과 전통의 문제다.
 
일반적으로 전통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 안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전해진 것”으로 “즉, 과거부터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자신들이 공유한 것의 통칭이 전통이다.” 전통은 과거의 대표상일 수는 있지만 전체상일 수는 없다. 이는 전통이 현재까지 선별되어 살아남은 것들의 집합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옛것을 해석할 때 주체가 드러나고, 그리고 옛것의 의미 역시 새로워진다는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논의*나, 전통 자체가 이미 현재의 주체가 선택하고 창출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논의**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이처럼 전통에 대한 해석은 관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맥락을 재해석하여 현재라는 시간에서 다시 의미값을 만들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전통이란 엄밀하게 따지면 ‘남겨진 것’이라기보다 ‘받아들여진 것’에 가깝다. 이 수용의 과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겠지만, 현재에서 ‘재의미화할 대상’,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질 ‘옛것’은 기본적으로 선대로부터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속의 과정과 의미의 재창출을 합친 것이 교육이다. 다시 말해 교육이란 ‘임의의 범주를 설정해 대상을 선별하여 전통화하는 과정’인 셈이다. 그리고 보통 교육은 언어, 다시 말해 이성(logos)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김범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교육의 양상이 부당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교육 자체가 부당하다기보다 이성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본다. 과연 사물들이 이성,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해서 지시하는 대상의 양태를 달리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작업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아니면 가능해야 하는가, 불가능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앞서 얘기했듯이 언어는 이미 고정불변의 가치를 상실했다. 언어로 지시된 대상은 더 이상 그 언어에 속박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언어가 그 대상의 또 다른 형태를 제시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어는 항상 맴돌고 있으며 단지 우리는 익숙해진 약속에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언어도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도 닿을 수 없다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A rock that was taught it was a bird) >에서 돌이 나무에 앉아 새라고 교육받는 상황은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 돌은 반드시 ‘돌’로 규정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새’로 규정한다고 해서 돌의 현실태가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A rock that learned the poetry of Jung Jiyong) >이나 <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A ship that was taught there is no sea) > 역시 마찬가지다. 시를 가르친다거나, 또는 배에게 항해할 바다가 없다고 가르치는 행위는 그 사물의 현재에 어떠한 변화도 줄 수 없다. 돌과 배는 그저 ‘현재 그렇게 있다’는 사실만 존재할 뿐이며 사물들은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의미가 사라진 표상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의가 사라진 기표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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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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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 정지용의 새를 배운 돌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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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 >, 2010
그러나 이런 무의미함에서 역설적으로 불변하는 가치를 발견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에 존재하는 대상은 그 이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대상은 비로소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상의 시간이 과거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행해야 하거나 담보 받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을 때, 대상은 비로소 존재한다. 이는 곧 과거나 미래와 엮이지 않는 고립된 현재시의 등장을 의미하며 대상이 ‘존재한다’는 현재형일 때 시간은 오로지 ‘지금’ 밖에 없다. 이는 곧 ‘순간’을 의미하는데 다시 말해 과거와도, 미래와도 연결되지 않는 고립된 시간의 등장이다. 극도로 축소화된 시간은 그 속에 ‘순간’을 자각하는 존재 말고는 어떠한 존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다. ‘순간’의 발견은 존재의 발견이기도 하다.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나 ‘여기에 있음’만을 인정할 때 대상은 순간을 살아간다. 그리고 동시에 그 순간 속에서는 영원하다. 영원이라는 개념이 시간의 무한인지 소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쪽이더라도 순간 속에서는 영원하다. 만약 영원이라는 개념의 시간을 상정한다면 ‘주어진 시간을 모두 영위하는 것’이 영원의 의미일 것이며, 시간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시간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그 의미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의 개념이 무한한 시간을 내포한다면 그 시간 속에 계속해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시간의 개념을 갖지 않는다면 영원의 가치는 시간을 배제함으로써, 다시 말해 물리적 시간하고는 무관하기에 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양립할 수 있는 시간 개념이 바로 ‘순간’이다. ‘순간’만큼 소멸적인 시간 개념도 없으며, 동시에 ‘주어진 시간을 모두 영위하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 개념이야말로 ‘순간’이 아니겠는가. ‘순간’ 속에서야말로 대상은 소멸하고 동시에 영원하다.
 
대상이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의 상실이자 내용의 소멸이며 이는 곧 대상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모습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형태야말로 가장 본질에 가까운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그것이 단지 절대적인 가치가 와해되고 남은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허무가 공존하는, 동경은 없지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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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과거의 이야기가 전통일 수 없다. 전통다운 전통은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 현재는 그 기준점이다. 현재의 의미와 무관한 기억들은 망각되지만, 현재 체험과 연루된 기억들은 새록새록 상기된다. 이야기는 현재의 체험과 상기된 과거 기억들을 묶어 의미화한다...(중략)...개인들의 의미화가 집단화된 현상이 전통이다. 전통에 대한 리쾨르 논의는 해석학의 토대에서 설명된다. 누구도 과거를 벗어날 수 없다. 과거에 있었다는 뜻의 ‘전통’은 좋든 싫든 존재한다. 전통은 말하자면 인간 삶의 굴레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반복, 답습된 전통은 위험천만하다. 반복된 과거는 현재, 미래도 과거와 똑같게 한다. 현재, 미래의 독특한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 삶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시간이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연결 고리가 독특해질 때 전통의 새로움이 드러난다.”
- 이양수, 『폴 리쾨르』, 커뮤니케이션북스(주), 2016.
 
** 앤더슨은 민족의 개념을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로 정의하면서 민족과 전통이 강조됨에 따라 애국주의가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는 과정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민족주의라는 문화적 조형물들이 서로 관련이 없는 역사적 동력들이 복잡하게 ‘교차해서’ 나온 우발적인 증류물로 창조되었지만 일단 창조되자 그것은 아주 다른 사회적 환경에 다양하게 의식적으로 이식될 수 있는 ‘조립물’이 되”었다는 앤더슨의 논의는 문화적 요소들이 단지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환경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립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 베네딕트 앤더슨,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출판, 2002.

참고문헌
 
게오르그 루카치, 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
최동호‧이숭원‧고형진‧유성호 외, 『현대시론』, 서정시학, 2014.
이양수, 『폴 리쾨르』, 커뮤니케이션북스(주), 2016.
베네딕트 앤더슨,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출판, 2002.
 
「설치미술가 김범의 작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OhmyNews(오마이뉴스)』, 2023.08.22.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53487
「“당신이 보는게 정말 당신이 보는 것일까”…해학적 작품으로 기존관념을 깨다」, 『경향신문』, 2023.07.26.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7261440011#c2b
「“웃긴데 뼈 때리네”...리움이 펼친 ‘작가들의 작가’ 김범의 30년 탐구」, 『서울신문』, 2023.08.01. 
https://www.seoul.co.kr/news/2023/08/01/20230801500055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리움 미술관. 
https://www.leeumhoam.org/leeum/exhibition/58
 
 
이미지 출처
 
리움 미술관 홈페이지 : https://www.leeumhoam.org/le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