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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을 통한 진화 후의 인간 :
방정호의 ‘선택적 진화(Selective Evolution)’ 시리즈
하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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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영화 , 손에 핸드폰 칩을 이식한 베서니(출처:왓챠)
< Years and Years >는 영국 BBC와 HBO가 공동 제작한 6부작 드라마로 BBC 1에서 2019년 5월 14일부터 6월 18일까지 방영되었다.  작가인 러셀 T. 데이비스(Russel T. Davies)가 각본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주인공은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이후를 살아가는 라이언스 가족이다. 드라마는 2019년부터 2034년까지 현재, 가까운 미래, 먼 미래로 나누어 암담한 디스토피아 정치, 경제, 환경, 과학, 문화 세계를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 Years and Years >에서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베서니(리디어 웨스트)의 ‘미디어는 인간 감각의 확장’이라는 마셜 매클루언(Herbert Marshal McLuhan, 1911~1982)의 말을 극대화한 트랜스휴먼(transhuman)의 지향점이다. 청소년기 그녀의 꿈은 언젠가는 사라질 육체에서 벗어나 디지털로의 전환 즉, 일생의 기억을 컴퓨터 클라우드에 업로드해 인간이 아닌 데이터로 영생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된 베서니는 트랜스휴먼화 시술로 손가락 피하조직에 핸드폰 칩을 이식해 엄마와 통화를 하고 뇌와 기계를 결합해 망막으로 가족을 촬영한다. 이처럼 에서는 수술과 시술을 통한 베서니의 트랜스휴먼화 갈망이 여러 번 포착된다. 그녀에게 있어 ‘트랜스휴먼이 된다’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영위한다.’라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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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방정호,  〈human〉,  2D Animation, 5분 0초, 2017.
기술을 통한 진화 후의 인간인 트랜스휴먼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은 방정호의 2021년작인 ‘선택적 진화(Selective Evolution)’ 시리즈 중 일부인 , 이다. 예술가는 인간, 진화, 의학, 과학기술 등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인류 진화 흐름과 변화를 철학적 사고로 민감하게 읽어낸다. 작가는 자신만의 예술적 상상력과 독특한 미적 감각을 더해 대중에게 사유의 메시지를 던진다.
‘선택적 진화’ 기반에는 2017년에 제작한 2D 애니메이션인  〈human〉이 있다. 이 영상은 유전체에서 특정 염기 서열을 인식한 후에 해당 부위 DNA를 잘라내는 유전자 교정(genome editing)을 상업적으로 악이용하는 유전자 가위 기술을 비판한 것이다. 작가는 더욱 진화된 생명체가 되기 위해 지적인 의학 설계 과정에서 보이는 인간의 잔인성과 변태성도 함께 고발한다. 이를 통해 방정호가 ‘인간과 진화 그리고 의학 기술’이라는 키워드에 상당 기간 관심을 기울여 왔음을 알 수 있다.
〈human〉이후, 인간 진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이고 확장된 그의 시선은 ‘선택적 진화’ 시리즈로 표출된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선택적 진화’는 무엇이며 어떤 시각으로 진화를 바라보는지  〈Organ Factory〉, 〈Assembly Line〉 을 통해 들여다보자.
 2021년에 제작한  〈Organ Factory〉와 〈Assembly Line〉은 ‘선택적 진화’ 시리즈로 계획된 총 5개의 작품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해당한다. 두 작품은 2022년 12월 보나 갤러리 개인전에서 선보인 디지털 이미지 기반의 인공생명 예술이다.** 상영시간은 각 1분 48초와 5분 06초로 1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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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방정호, 〈Organ Factory〉 , 3D Animation, 1 분 48초, 2021.
〈Organ Factory〉의 첫 장면은 장난감을 연상시키는 붉은색 레버와 함께 노란색 버튼의 작동으로 시작된다. 원형 플라스크에 든 심장, 손, 뼈와 동일한 컬러 블록들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특정 기계 장치를 지나는 순간 복제 인공장기로 탄생한다. 이때 인공장기는 신체 고유색을 그대로 가진다. 실제 장기와의 구성물질은 다를지라도 같은 기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여러 개의 복제 인공장기 중 선택된 장기는 유리관을 타고 이동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기성품이 쇼핑 상자에 담기듯 복제 장기는 유리구슬에 개별 포장된 후, 트럭에 실려 옮겨진다. 나머지 컬러 블록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 여러 장치를 통과하며 인간 진화를 위한 제품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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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방정호,  〈Assembly Line〉 , 3D Animation, 5분 06초, 2022.
〈Organ Factory〉의 영상은 〈Assembly Line〉로 연결된다. ‘선택적 진화’의 두 번째 시리즈인 〈Assembly Line〉은 복제된 인공장기의 이동과정과 조립공정이다. 램프웨이 위에 정차한 트럭에서 장기 구슬이 인체 내부로 연결된 유리관을 타고 들어간다. 형형색색의 인공장기가 이식된 신체 내부에 새 장기 구슬이 제 위치를 찾아가 장착되면 두개골이 탑재된다. 이어 인공 경추가 조립되고 흉골이 닫힌다. 인간은 신형 인공장기 탑재로 선택적 진화의 궤도에 오르며 이질적 속성을 지닌 물질과 융합되어 신체와 심리 강화로 더 긴 생명을 보장받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선택적 진화’ 시리즈에서 작가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은 ‘진화’라는 단어와 인공장기가 만들어지고 조립되는 ‘공장’이라는 장소 그리고 배경으로 존재하는 ‘음’이다.
진화는 ‘변천’,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생물체의 어떤 기관이 발전적인 방향성으로 나아가는 진보뿐만 아니라 퇴보도 포함한다. 진화를 경험하는 종은 생존에 유리한 상황을 판단하고 진화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종의 진화에는 방향성, 목적, 의지 등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생존만이 있을 뿐이다. 이 작품명에서 ‘진화’의 명시적 의미는 앞서 설명한 ‘변화’ 그 자체를 뜻한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볼 것은 작가 메시지가 내포된 암시적 의미와 징후적 의미의 ‘진화’이다.
암시적 의미의 ‘선택적 진화’는 발전된 과학과 의료 기술을 통해 증강된 신체와 수명 연장으로 ‘더 발전된’, ‘더 월등한’ 진보적 의미이다. 이는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 1948~ )이 『마음의 탄생』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뇌를 언제든 수리하고 업데이트해 현재의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슈퍼인텔리전스로 과학기술과 환경 변화에 맞춰 그 시대의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이 오랫동안 삶을 영위하는데 유리한 특징을 가진 새로운 종이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 그러나 징후적 의미는 기술의 도움으로 〈Years and Years〉의 베서니처럼 신체적, 지능적으로는 진보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성 상실 우려, 인간 존엄성 위협과 개념 변화에 따른 사회적·정서적 불안정성, 기술지상주의 등을 함축한다.
선택적 기술을 통한 인간 진화에 대한 예술가의 우려가 담긴 시선은 공장이라는 장소성과 배경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공장은 일정 규모의 기계 설비를 갖추고 원료나 재료를 가공하여 물건을 제조하는 곳이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brand-new) 또는 새 상품을(new product) 반복적으로 다량 생산하는 장소라는 뜻도 포함한다. 공장에서의 원료 가공은 원재료 특색을 상쇄시킴과 동시에 형식적, 내용적으로도 동일성을 가진다. 공장에서 만들어질 미래 인공장기는 동일성으로 귀결되어 AS센터에서 교체되는 한 제품의 부품처럼 장기 이름이 아닌 고유 번호로 명명될 것이다. 방정호는 공장이라는 장소성을 통해 오랜 기간 적재된 인간의 유전정보가 변이되어 생물학적 종 특성이 바뀌거나 없던 종이 만들어진 이후의 사회 문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무한대로 늘어나는 인간수명으로 인한 윤리 가치 기준에 대한 의견 충돌도 이야기한다.
배경음의 경우, 〈Organ Factory〉의 경쾌한 음은 이식 이전의 영생을 향한 기대 심리를 나타낸다. 〈Assembly Line〉에서의 긴장감과 떨림이 감도는 기계음은 이식 후의 부정적인 시각, 트랜스휴먼화에 따른 사이버 보안 문제 발생, 기술 점령 계층과 국가, 이에 따른 자본축적의 불균형 심화 문제 등을 담고 있다. 작가는 〈Organ Factory〉의 밝은 리듬과 〈Assembly Line〉의 변주된 기계음의 대비, 작품 전반의 사랑스러운 영상미와 기계 장치의 차가운 이미지 대조를 통해 무분별한 인간종 진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집약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전달한다.
방정호는 ‘선택적 진화’ 시리즈를 통해서 관객에게 미래의 새로운 인간종 확장과 변형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더불어 진화 과정에서 야기될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문제 등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할 기회도 제공한다.

* 영국의 유럽 연합(EU) 탈퇴를 말하는 것으로 영국(Britain)과 탈퇴(exit)를 합쳐서 만든 합성어이다.

** 사이먼 페니는 인공생명예술 작품을 크게 디지털 세계에서 텍스트나 이미지로 구현되는 작품과 실제 공간에 하드웨어적 형태로 구현되는 작품들로 구분한다. 그에 따른 세부적인 분류를 다섯 개의 범주로 분류한다. 첫째, 진화된 회화, 조각, 생태, 애니메이션으로 주로 디지털 이미지 형태의 작품, 둘째 가상의 생태 환경에 구축된 작품, 셋째, 텍스트 기반의 에이젠트(agent)와 채팅 로봇 등에 의한 작품, 넷째, 개체 및 군집 단위의 자율적 에이전트((autonomous agent)에 의한 작품, 마지막으로 물리적인 신체를 지닌 인공생명 시스템을 가진 작품이다. 임경호, 윤준성, 「인공생명예술의 미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 -사이먼 페니의‘인공생명예술의 미학’을 중심으로-」, 『예술과 미디어』9권 2호, 한국영상미디어협회, 2010, p. 8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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