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없이는 인간 활동 혹은 문화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음에도 몸 자체를 다루는 연구는 더디게 이루어졌다. 이는 인간의 몸이 존재를 규정하는 불변의 요소이자 ‘이미 주어진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 연구 내에서 비교적 작은 위치를 차지했던 몸에 관한 분석은 최근 사조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이에 몇몇 이론가들이 몸에 대해 ‘인간 활동에 필요한 수동적이지만 필수적인 기반’, ‘체험의 필수적 매체’ 등의 견해를 제시했다. 오스트리아 언어학자이자 영화 제작자인 베르나데트 베겐슈타인(Bernadetter Wegenstein, 1969- )은 이러한 견해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현재 미디어 연구의 이론적 논의 내에서 몸이 차지하는 중심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이 요구된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몸은 과연 매체인가, 몸이 매체라면 어느 정도나 매체인가, 그리고 어떤 근거로 몸을 매체로 여길 수 있는가.
인간의 몸은 외부적으로 크게 머리와 목, 몸통과 두 개의 팔, 다리, 내부적으로는 각각 뼈, 장기, 혈액, 수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며 각 부분은 생명 유지를 위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가 보통 ‘몸’이라 부르는 유기체, 즉 인간의 신체는 이러한 생물학적 정의와 함께 역사적으로 진화되어 온 여러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의 몸은 미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치장과 신체 변형을 통해 기록의 바탕으로 몸을 활용하고 몸의 물질적 측면을 조명하였다. 신체의 외양을 꾸미는 행위는 특정 문화권 내에서 아름다움을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다. 이는 몸이 지닌 바탕으로서의 기능을 드러낸다. 조금 다른 예로 신체 퍼포먼스의 경우 특정 행위를 통해 부당한 문화적 횡포를 폭로하고 우리 사회가 타자의 몸을 배척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때 몸은 비판적 기록의 바탕으로 활용된다.
베겐슈타인은 “대상으로서의 몸과 체험 대행자로서의 몸 사이의 긴장이 신체의 역사를 형성하며, 각 시기의 문화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체현의 체험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고 설명한다. 역사적 예로 중세 유럽에서 몸에 대한 지각과 몸을 통한 지각은 지금 우리의 지각 개념과는 차이가 있었다. 근대 이후 ‘재현의 수행적 가치’가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나 메시지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중세의 종교적 행위는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육체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있다. 문학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에깅턴(William Egginton, 1969- )은 이런 효과를 ‘현존(Presence)’이라 부른다. 베겐슈타인은 대상으로서의 몸과 대행자로서의 몸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의학을 언급한다. 16세기 이후 인간은 질병의 증상, 질환의 극복을 목적으로 몸을 해부하고 연구하기 위한 방법을 발전시켰으며, 최근 의학 영상기술의 발달로 몸의 내부에 대한 접근성은 더욱 향상되었다.
중세의 개인들이 특정 계급이나 집단, 종교적 정체성이라는 의미에서 자기 몸을 체험했던 반면 근세에 이르러 인간은 이미 자신의 몸을 ‘자율적 존재’로 여겼다. 이런 변화는 철학적 원칙을 통해 체계화된다.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몸을 정신이 머물고, 정신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 대상으로 파악했으며 몸과 정신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몸과 정념을 지식, 사유의 장애물로 여기는 그의 이론과 정념이 정신을 분산시킨다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주장은 이후에도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몸을 정신에 의해 지배되는 수동적 물질로 보는 견해는 몸을 사회적 지위나 특정 그룹에 관한 표현으로 여기는 연구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근대성은 몸을 개별 자산으로 평가하는 사회를 열어주었고, 브라이언 터너(Bryan Stanley Turner, 1945- )는 이를 “신체적 사회(Somatic Society)”라고 일컬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권력이 몸에 적용되는 방식을 기준으로 법률사회, 규율사회, 감시사회를 구분한다.
20세기 이후 데카르트에 의해 내부와 외부로 분리되어 있던 몸의 영역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중요시되기 시작했다. 버나드 앤드루(Bernard Andrieu, 1959- )는 이를 ‘몸의 인식론적 확산’이라 특징지었으며, 정신분석학의 탄생과 현상학의 대두, 인지과학의 발전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정신분석학의 목표는 무의식이 어떻게 특정한 신체적 증상으로 발현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몸은 욕망을 위한 탈것으로, 매체의 역할을 수행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6)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내면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것이 신체적 욕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몸과 간단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논의에서 몸은 주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기대와 욕망(무의식)으로 수립됨과 동시에 타인들의 응시(타인의 기대)를 통해 그 의미를 매개한다. 다시 말해 정신분석학에서 에고(Ego)는 내부적인 동시에 외부적이다.
현상학적 관심사의 핵심은 몸을 통해 세계를 체험하는 자동지각(autoperception)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 몸은 외부 세계와 자아 간의 필수적인 매개체가 된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1941)은 몸이 이미지에 관한 매개를 통해 외부와의 관계를 구성할 책임을 맡는다고 공식화했다. 몸은 자기 존재가 체현된 지점이며, 지각은 ‘이미지의 세계’ 내에서 불필요한 이미지를 빼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몸 자체는 특권을 지닌 이미지이자 존재와 인식의 중심, 세계에 대한 인터페이스이다. 후기의 현상학적 접근에서도 몸과 세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부터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에 이르는 다른 주요 현상학자들에게 있어 몸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후설은 “나는 생각한다.”보다 “나는 할 수 있다.”가 더 본질적이라 주장한 바 있다.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분석을 확장하여 신체의 운동성에 집중하고 세계 내에서 체현된 코기토(cogito)의 성취로서 지각을 재설정한다. 그는 ‘살(flesh)’이라는 원초적 상호성(Primordial Reciprocity)을 통해 몸과 세계를 연관시키며, 후설의 이론을 빌려 감각의 이중성에 관해 설명한다.
인지과학의 발전은 점진적 탈체현의 과정이며 뇌 자체의 구조와 작용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인공지능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몸은 더 이상 정신의 기반이 아니다. 캐서린 헤일스(Katherine Halyes, 1943- )는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How we became Posthuman』(1999)에서 특정한 물질성보다 정보 처리가 우위를 점하는 이런 현상을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고 명명한다. 나아가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1928- )이나 한스 모라벡(Hans Moravec, 1948- )같은 인지주의자들에게 신체의 웨트웨어(Wetware)는 기술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이다. 인지과학의 발달은 이렇듯 몸과 마음을 각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계와 프로그램의 유사체로 자리매김 시키고 둘 사이의 관계를 기능적인 관계로 바꿔버렸다.
20세기 후반부터 인간과 인간의 몸을 고려할 때 기술의 문제가 개입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휴머니즘의 이분법 없이 인간 주체의 통일성을 재고하는 가운데 기술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가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기 위한 주요 논제로 대두되었다. 이처럼 인간에 관한 고전적 정의와 개념들이 의문시되며 등장한 것이 포스트휴먼 담론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중심에는 20세기 후반 인간 능력의 향상, 강화와 관련된 생명유전공학, 인지과학, 정보통신 빛 매체 기술, 컴퓨터 공학, 사이버네틱스, 나노 기술과 같은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달이 자리 잡고 있다. 더불어 그것의 사상적 토대는 과학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현대 철학이기도 하다. 인간에 관한 이분법적 이해를 극복하고자 한 20세기의 철학자들, 가령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철학, 실존주의와 현상학,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담론들은 데카르트가 주목하지 않았던 신체자아 및 상태에 주목하고 이원화된 구분을 비판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을 구성하는 원리의 일부로 기술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는 하나, 신체적으로 나약한 인간의 독자적 생존을 우려하거나 새로운 인간종의 탄생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주체와 타자, 비물질적 주체와 물질적 세계가 더 이상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는 기술 발전에 힘입어 향상되고 변화한 인간존재를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인간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 남성과 백인 중심주의를 근간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휴머니즘의 극복에 따른 새로운 휴머니즘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서 포스트휴먼은 기계·생물학·의학의 발달로 신체적으로 향상되고 변형된 인간을 의미하며, 보다 넓게는 디지털 기술과 바이오 기술에 의해 변화한 환경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인간을 지칭한다. 이는 비인간적인 모든 것을 타자화해 온 근대적 사고방식의 극복이자 지구, 자연, 동물 등과 함께 생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생태계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