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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이 
바라본 인간향상
히지노(ARTIST)
과학기술의 발전은 단지 우리 삶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제와 사회, 문화, 정치를 포함한 일상의 전 영역에 걸쳐 광범위한 변화를 유발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이는 주체가 타자와 관계하는 방식, 세계와의 상호작용, 자기 인식의 양상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진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변화와 발전은 단순히 산업 성장이나 경제 발전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활동과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나 구조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한다.
인간이 기술을 개발하는 수많은 목적 중 하나는 인간향상(Human Enhancement)일 것이다. 인간향상이란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건강수명 연장이나 노화의 극복을 비롯하여 지적·정서적·신체적·심리적 능력의 개선 혹은 강화를 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향상’은 어떤 것의 나아짐, 혹은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개선을 의미하는 긍정적 평가를 내포하며, 기술을 통한 인간향상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지향점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학술적 논의의 맥락 속에서 인간향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그것이 내포한 의미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표현 자체만 두고 본다면, 향상의 대상은 인간 그 자체이며, 인간향상은 마치 인간 존재의 나아짐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의 논의에서 향상은 능력의 정도, 강도, 크기의 늘어남이나 개선됨을 의미하며, 이는 인간 존재의 완전함을 정의하거나 지향하지는 않는다.


닉 보스트롬(Nicck Bostrom, 1973- )은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을 “노화를 제거하고 인간의 지적·육체적·심리적 능력을 강화하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키며, 이러한 가능성과 그 바람직함을 긍정하는 지적·문화적 운동”으로 정의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트랜스휴머니즘은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건강수명을 연장하거나 질병이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고, 지적·육체적·정서적 능력을 증진하는 것과 같은 인간향상을 긍정하는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인간향상 기술의 사용이 야기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 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닉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머니즘을 “인간의 한계를 극복케 해주는 기술 및 그 잠정적 위험성에 대한 연구와 그러한 기술의 사용에 관련된 윤리적 문제에 대한 연구”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이 단순히 기술낙관주의의 입장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미래 기술의 혜택과 더불어 인류의 소멸을 포함한 엄청난 위험의 가능성도 함께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프랜시스 후쿠야마(Fukuyama Francis, 1952- )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 중의 한명이다. 그는 『Foreign Policy』 잡지에 투고한 글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각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며, 특히 그의 책 『우리의 포스트휴먼 미래, Our Posthuman Future』(2002)에서 생명공학을 중심으로 한 인간향상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 논의를 펼치고 있다. 후쿠야마가 트랜스휴머니즘에 반대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생명공학이나 첨단 기술을 통한 인간 향상의 시도가 자연적인 인간 본성을 변화시킬 것이며, 그에 따라 그러한 자연적 본성에 기초하고 있는 인간 존엄성을 훼손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후쿠야마의 트랜스휴머니즘 비판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되며, 각 단계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권리는 우리의 자연적 본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인간의 도덕상이나 도덕적 지위의 기초가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인간 본성이다.
2.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진화생물학을 위시하여 과학이 알려주는 종의 전형적인 행동과 특성의 총합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환경적이라기보다 유전적인 요인에 기인한다.
3. 생명공학을 통한 인간향성은 인간 본성의 변화나 파괴를 가져온다. 인간본성은 복잡한 전체이며, 인간의 많은 특성들은 그 부분들의 합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창발적이다. 생명공학을 통한 인간 향상의 시도는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야기함으로써, 인간 본성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반한 인간향상에 관하여, 트랜스휴머니즘이 정신업로드와 같은 신체의 기계화까지 고려하고 있는 반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을 구성하는 원리의 일부로 기술의 중요성을 인정하나, 이것이 신체적으로 나약한 인간의 독자적 생존을 우려한 새로운 인간종의 탄생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바라보는 인간향상에는 의미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 차이는 기술의 진보에 따른 인간 존재의 의미 변화와 생명공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가들의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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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샤 피치니니(Patricia Piccinini, 1965-)는 현대의 기술과 가상 미디어가 자연과 인공 사이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방식에 관심을 둔 작가이다. 작가는 현대적 맥락에서 ‘자연’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피치니니의 조각 < 젊은 가족(The Young Family) >(2002)은 동물과 인간의 혼종생물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키메라(Chimera)와 같은 이 존재의 형상적 특징들을 인식하고 나열할 수 있지만, 이를 정확히 무엇이라 정의하기는 어렵다. 작가는 이 작품에 관해 장기 이식을 위해 길러진 동물을 상상하여 만들었다고 언급한다.
시드니 비엔날레에 전시된 < 스틸 라이프(Still Life with Stem Cells) >(2002)에서 피치니니는 합성 유기체와 인간의 생태적 관계에 관한 문제에 주목한다. 해당 전시에서 작가는 기괴한 형상의 살덩어리를 가지고 노는 어린 소녀의 조형물을 선보였다. 피치니니는 얼룩덜룩한 피부와 머리카락 뭉치 그리고 오리의 부리 같은 것을 가진 형상을 제시했으며, 이는 배아줄기세포 기술로 생성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줄기세포는 피부, 간, 뇌와 같은 특정 결과물로 분화하기 이전의 물질로 완전하지 않은 잠재력과 변형 가능성을 가진다. 인간의 생명 유지 및 향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자기 자손을 마주하고 있는 장면, 아직 무엇도 아니나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는 형상을 마주한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관람자는 인간 복제와 같은 기술이 가져올 부작용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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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피나르 욜다스(Pinar Yoldas)는 예술, 디자인, 건축, 미디어, 신경과학 등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예술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013년 이스탄불 개인전에서 욜다스가 발표한 (2013)는 강화된 신피질로 제작된 일종의 맞춤 아기들이다. 이들은 아직 세부적인 기관으로 충분히 분화하지 못한 잠재된 생명을 대변한다. 이 아기들은 인류의 미래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미생물과 같은 우리의 기원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미적, 사회적 향상(enhancement)을 위해 대뇌변연계를 강화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매우 뛰어난 공감 능력을 지닌 아기의 디자인을 시도한다. 새로운 인류가 신체뿐 아니라 정서까지도 강화되어 향상된 공감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담론에서 실제로 제기되고 있는 주장과 일치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인간 향상은 새로운 세대 전반에 걸친 도덕적 향상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 이후 생명공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신체는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닌 복제되고 생산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피치니니와 욜다스의 작업은 새로운 기술적 환경을 마주한 인간의 윤리적 문제들을 강조한다. 작가들은 관람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처한 환경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그 기준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러한 삶을 추구하거나 창조하는가. 새로운 기술에 의한 합성유기체는 우리와 동등한 존재인가. 생명공학 및 의학이 인간향상을 위해 필요한 영역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한 인간의 정체성 및 여타의 윤리적 문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작가는 위와 같은 작업을 통해 기술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한편, 우리가 그러한 기술을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참고문헌
 
신정민,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작품으로 본 포스트휴먼 에콜로지」,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석사학위논문, 2019.
 
신상규, 「트랜스휴머니즘과 인간향상의 생명정치학」, 『일본비평』 17호,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7, 72-95.
신상규, 「인간향상과 인간본성, 그리고 인간 존엄성-후쿠야마의 논증비판」, 『철학적분석』 27호, 한국분석철학회, 2013, 107-132.
 
신상규,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 그리고 삶의 재발명”, 2002.
윤민화, "포스트휴먼의 우산을 쓴 과학기술적 예술 실천들", 2022.
 
이미지 출처
 
https://www.brooklynmuseum.org/eascfa/about/feminist_art_base/patricia-piccinini
https://www.multispecies-salon.org/haraway/girl/
Merete Lie, "New techno-natures: the future of human reproduction in sci-art", Science as Culture, 2022, p. 10.